[ 정 말 ] 이정록 詩
"참 빨랐지!
그 양반!"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ㅡㅡㅡㅡㅡㅡㅡㅡ
( 조정현의 詩評 )
< 이정록 시집 '정말' 중에서 >
이정록(1964~)시인
충남 홍성 태생 시인, 고교 교사
이 詩 참 재미있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이토록 슬픈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풀어낼 수 있었을까요?
우리 인생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 1연에서는 일찍 저세상으로 간
신랑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돌아가신 분이 성격이
참 급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일찍 가시는 분들은
뭔지 모르게 급하게
서두르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 2연은 두 분이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마시고 오토바이에
맞선녀를 번쩍 안아서 태웠을까요.
오토바이에 태웠으니 남정네의
등에 여자의 가슴이 스치면서
젊은 혈기에 확 불을 싸 지른 것
같습니다.
얼마나 참기 힘들었을까요.
그것도 바야흐로 봄날인데
말입니다.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정말 한 순간에 모든 운명이
결정되고 마는 순간이 2연에서
펼쳐지는데
1연에서의 슬픔의 정조는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읽는 내내
웃음이 삐죽삐죽
새 나오게 만드는 서사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마지막
* 3연은 더 절창입니다.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얼마나 빨리 끝났으면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었을까요?
그야말로 절묘한 묘사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가 나옵니다.
분명 슬픈 이야기인데 어쩜
이렇게 슬픔을
웃음으로 단박에 바꿔칠 수
있는 걸까요?
거의 마술처럼 슬픔과 웃음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웃음 마술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워낙 첫 행사를 빨리 끝내신
양반이라서 바람 한 번 피울
여력이 없으셨겠지요.
그런데 가정용도 안되었으니,
어떻게 상업용이 되었겠냐는
말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집니다.
그리고 마무리는 정말 날랜
양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빨리 보낼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힘이라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내공으로 가득찬 시인의
넉살 때문에 많이 웃었습니다
- 옮긴 글-
♣ 웃는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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