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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말 ] 이정록 詩

원짱 쉼터 2022. 4. 2. 10:36

 

 

 [ 정 말 ] 이정록 詩

 

 

"참 빨랐지!

그 양반!"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ㅡㅡㅡㅡㅡㅡㅡㅡ

 

( 조정현의 詩評 )

 

< 이정록 시집 '정말' 중에서 >

 

이정록(1964~)시인

충남 홍성 태생 시인, 고교 교사

 

이 詩 참 재미있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이토록 슬픈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풀어낼 수 있었을까요?

 

우리 인생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 1연에서는 일찍 저세상으로 간

신랑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돌아가신 분이 성격이

참 급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일찍 가시는 분들은

뭔지 모르게 급하게

서두르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 2연은 두 분이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마시고 오토바이에

맞선녀를 번쩍 안아서 태웠을까요.

오토바이에 태웠으니 남정네의

등에 여자의 가슴이 스치면서

젊은 혈기에 확 불을 싸 지른 것

같습니다.

 

얼마나 참기 힘들었을까요.

그것도 바야흐로 봄날인데

말입니다.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정말 한 순간에 모든 운명이

결정되고 마는 순간이 2연에서

펼쳐지는데

 

1연에서의 슬픔의 정조는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읽는 내내

웃음이 삐죽삐죽

새 나오게 만드는 서사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마지막

 

* 3연은 더 절창입니다.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얼마나 빨리 끝났으면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었을까요?

 

그야말로 절묘한 묘사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가 나옵니다.

 

분명 슬픈 이야기인데 어쩜

이렇게 슬픔을

웃음으로 단박에 바꿔칠 수

있는 걸까요?

거의 마술처럼 슬픔과 웃음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웃음 마술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워낙 첫 행사를 빨리 끝내신

양반이라서 바람 한 번 피울

여력이 없으셨겠지요.

그런데 가정용도 안되었으니,

 

어떻게 상업용이 되었겠냐는

말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집니다.

 

그리고 마무리는 정말 날랜

양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빨리 보낼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힘이라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내공으로 가득찬 시인의

넉살 때문에 많이 웃었습니다

 

- 옮긴 글-


웃는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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