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족 / 김수영
고색(古色)이 창연(蒼然)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新鮮)한 기운(氣運)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長久)한 세월(歲月)이 흘러갔던가
파도(波濤)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世代)를 가리키는 지층(地層)의
단면(斷面)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家族)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家族)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전령(全靈)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書冊)은
위대(偉大)한 고대조각(古代彫刻)의 사진(寫眞)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聖)스러운 향수(鄕愁)와 우주(宇宙)의 위대감(偉大感)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刺戟)을
나의 가족(家族)들의 기미많은 얼굴에
비(比)하여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이 빠져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不自然)한 곳이 없는
이 가족(家族)의 조화(調和)와 통일(統一)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偉大)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柔順)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罪)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房)안에서
나의 위대(偉大)의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뿌리- 민음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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